(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④대항해시대 에스파냐의 수탈로 멍든 볼리비아
작성자 : 임두빈 | 작성일 : 2018-06-18 19:54:32 | 조회수 : 4,359 |
국가 : 볼리비아 | 언어 : 한국어 | 자료 : 사회 |
출처 : 뉴스토마토 | ||
발행일 : 2017.03.24 | ||
원문링크 :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739596 | ||
원문요약 : 필자 임채원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했다. 현재는 동대학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재직하며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 국정운영을 연구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는 필자가 2년간 볼리비아에서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항해시대 이래 지속된 세계화의 그늘에 관해 <뉴스토마토> 지면에 격주 금요일마다 총 11회로 연재한다. | ||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으로 다리를 놓으면 에스파냐 마드리드까지 이어지고, 은 생산을 위해 죽은 인디오의 시체를 이으면 영국 런던까지 간다."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ci)는 1492년 지리상의 발견으로 시작된 300년간의 대항해시대 아픔을 갖고 있다. 포토시의 리코산(Cerro rico)은 피맺힌 500년의 수탈 현장이었다. 해발 4800m의 이 민둥산은 잔혹한 서구 식민의 역사 덕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포토시에 있는 동전박물관이나 에스파냐 식민 관료들이 생활한 수크레(Sucre)에 남아 있는 그림들을 보면, 에스파냐 국왕이 리코산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알 수 있다. 카를로스 1세는 은으로 뒤덮인 이 언덕에 '리코산의 우리 성모(Nuestra Senora de Cerro Rico)'라는 명칭을 하사했다. 리코산을 신이 자신에게 준 축복이라고 믿은 에스파냐 왕과 관료들은 포토시 은광을 다양한 형태의 성모님 형상으로 남겼다. 포토시의 동전박물관에 있는 '리코산의 우리 성모' 그림. 에스파냐 국왕이 리코산 은광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그림은 리코산 내부를 성모의 형상으로 상징화하고, 가톨릭 교황과 에스파냐 국왕이 성모를 호위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대항해시대의 '폭력적' 세계화 지리상의 발견은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나는 길을 열었지만, 그 만남은 폭력으로 얼룩졌다. 세계화는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김영삼정부 때인 1990년대에 본격화된 게 아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지리상의 발견이 시작된 후부터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추세로 진행됐다. 인류의 불행은 세계화가 지극히 폭력적 방식으로 펼쳐졌다는 점이다. 콜럼버스의 항해가 가능했던 것은 조선술과 항해술이 이때 장족의 발전을 이뤘기 때문이다. 근해를 돌아가는 것과 대양을 직선으로 항해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콜럼버스는 북아프리카 서북쪽 카나리아 제도에서 직선거리로 33일간 항해한 끝에 서인도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섬에 닿았다. 인류사의 격변을 예고한 대형 사건이었다. 1500년경 서구인들은 반(半) 밀레니엄 분위기에 젖었고 천년왕국이 곧 도래한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콜럼버스 같은 모험가들에게 새로운 세계로 도전하는 열정을 일으켰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시대적 분위기가 서구의 해상 팽창을 부추긴 것이다. 물론 신세계로 가면 금·은 등으로 도배를 한 신대륙을 찾을 수 있다는 탐욕도 작용했다. 이미 150여년전 마르코 폴로는 동쪽에 금으로 된 '지팡구(Jipangu)'라는 나라가 있다고 전했다. 서구인들은 조선과 항해술의 발달에 힘입어 모험을 감행했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직후부터 약탈과 착취에 몰두했다. 대상은 금과 은이었다. 수천년간 축적된 금을 불과 2~3년 새 모두 가져갔다. 보이는 대로 금을 뺏었고, 원주민들에게는 사금 생산을 강요했다. 30년간 생산 끝에 사금이 바닥나자, 이번에는 은광 개발로 눈을 돌렸다. 알토 페루지역의 포토시와 멕시코의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가 대량의 은 생산지로 주목받았다. 리코산 은광과 그 아래로 펼쳐진 포토시의 전경. 은광은 큰 산과 작은 산으로 2개로 이루어져 있다. 리코산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대항해시대를 상징하는 은광의 세계사적 의의를 인정받은 것이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의 최종 귀착지, 중국 포토시 은광의 존재는 원래 이 지역 인디오들도 알았지만 지모신(地母神) 신앙으로 개발 대신 보존을 택했다. 은광의 존재를 안 에스파냐는 1545년 무렵부터 개발에 나섰다. 그들에게 리코산은 축복이었다. 그냥 산 자체가 은으로 이뤄졌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노천 광맥 4개를 따라 은을 퍼 날랐다. 이런 상태가 약 20년간 지속됐다. 당시 은은 대서양 건너 유럽으로 날라졌지만, 최종 귀착지는 중국이었다. 카를로스 1세는 필리핀 루손섬을 동아시아 무역 거점으로 확보했는데, 포토시에서 출발한 은은 대서양을 돌아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난 후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인도의 고아를 들렀다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해 루손섬이나 마카오에 도달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도자기, 비단, 생사와 교환됐다. 루손섬이 개발된 뒤에는 알토 페루에 위치한 포토시에서 페루 리마로 은을 나르고 태평양 근해를 따라 루손섬까지 이동했다. 중국으로 들어간 은은 부패한 관료와 상인들의 손에 쥐어졌다. 중국은 에스파냐와 일본에서 대량 수입된 은을 바탕으로 '은 본위제'를 확립한다. 포토시 인디오들은 은광에서 수없이 죽어나갔지만, 지구 반대편 중국에서는 탐관오리들이 은을 비밀 창고에 가득 쌓았다. 이렇게 대항해시대에는 금과 은을 매개로 '아메리카 귀금속 생산→유럽 유입→아시아 유출'이라는 지구적인 세계 무역제도가 완성됐다.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 은 생산국은 일본이었고, 멕시코도 은광이 있었지만 지구적 연계의 정점에는 포토시 은광이 있었다. 카를로스 1세가 포토시 광산을 '신이 자신에게 준 축복'이라고 생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자신이 신탁을 받은 세계 제국의 군주라고 믿었고, 신의 대리인으로서 사명을 다 할 수 있도록 은광을 선물 받았다고 여겼다. 리코산 은광에서 포토시 시가지를 내려다 본 모습. 해발 4800m의 광산촌은 음식물에 곰팡이가 쓸지 않을 만큼 건조하고 주변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다. 이곳은 과거 세계에서 런던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으며, 영욕을 함께 품고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유럽 전쟁의 비용을 메우다 1500년에 태어난 카를로스 1세는 10대 후반에 즉위해 1558년 죽을 때까지 유럽을 넘어 세계 정치의 한가운데서 살았다. 그는 많은 유럽 왕조들과 혼맥을 맺고 에스파냐는 물론 나폴리와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에서도 국왕으로 즉위했다. 재위 기간 가장 큰 정치적 위기는 오스만투르크 왕국의 술레이만 2세와 오스트리아에서 벌인 '빈 포위 전쟁'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그해, 에스파냐는 이슬람 세력이 마지막으로 차지하던 지브롤터를 되찾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이슬람으로부터 가톨릭을 지키는 수호자를 자처했다. 그런데 합스부르크 가문이 자리 잡고 있던 빈이 이슬람에 언제 함락될지 모를 위기에 처하자, 그는 사력을 다해 이를 막았다.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빈을 지켜내고 오스만투르크 군을 그리스 남단으로 철수시켰다. 카를로스 1세는 가톨릭의 수호자이자 신의 정치적 대리인을 자처한 탓에 재위 기간 유럽 곳곳에서 무력충돌을 감행해야 했다. 막대한 전쟁비용이 필요했고, 에스파냐는 상시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전비 조달을 비롯해 국고 확충이 관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 30여년 만에 포토시 은광이 신의 선물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다. 세계 제국의 군주를 꿈꾸었던 그에게 포토시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신의 인증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포토시를 성모의 형상으로 그려 수차례 포토시와 수크레로 보냈다. 그는 충심으로 포토시의 은광을 선사한 신에게 감사했다. 카를로스 1세가 죽고 아들 펠리페 2세가 즉위할 무렵, 포토시 은광의 광맥들은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멕시코에서 수은을 이용해 은의 함유량이 낮은 광석에서도 은을 추출하는 기술이 개발됐다. 1565년에는 페루에서 수은 광산까지 발견되자 신기술을 활용해 포토시의 은 생산량은 다시 급증했다. 노천광에서 노다지로 은을 주워 담던 1540년대에 연 8만5000㎏ 정도였던 은 산출량이 1570년대 연간 5만~6만㎏으로 줄었다가, 수은을 활용한 신기술이 사용된 1580년대에는 28만㎏까지 늘었다. 리코산의 은으로 만든 부조 조각. 큰 피자 크기로 동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각에는 리코산이 새겨졌다. 은으로 부조 조각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과거 풍성했던 은 생산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가혹한 노동과 코카잎의 대량생산 에스파냐 국왕은 포토시를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금과 은을 실어 날라 부를 쌓았지만 포토시 인디오들은 자원 수탈은 물론이고 은광 개발에 희생돼 인구가 급격히 줄었다. 광산 노동은 엄청 가혹했다. 인디오들은 지하 깊이 내려가서 무거운 광석을 지고 250m 높이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했다. 그들은 12시간 동안 50㎏ 무게의 포대를 25개나 날랐다. 심지어 에스파냐 식민당국이 정한 법정 노동시간 12시간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1년 내내 이런 가혹한 노동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식민당국이 고안해 낸 것이 광산 노동자들에게 코카잎과 가성소다를 제공, 그들이 마약 성분의 힘으로 노동을 지탱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원래 잉카 제국에서 코카잎은 향정신성 효과를 활용해 신에게 제사나 종교행사를 할 때만 쓰도록 제한했다. 그런데 식민당국은 마약 성분의 잎사귀를 대량으로 재배해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했다. 전세계적으로 악명높은 코카인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됐다. 볼리비아와 콜롬비아에서 생산된 코카잎이 콜롬비아 등에서 코카인으로 제조돼 멕시코 국경을 지나 미국으로 수송되는 마약 생산과 판매의 오랜 흑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에스파냐 식민당국은 은을 수탈한 것도 모자라 인디오들의 건강과 생명까지 위협했다. 당시에는 포토시와 수크레가 위치했던 추키토(Chucito) 주의 인디오들이 광산 노동자들로 징발됐는데, 1628년~1754년 사이 이곳의 인구는 3분의 1로 급감했다. 그 이전은 통계조차 남아있지 않아 얼마나 많은 인디오들이 희생됐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도 포토시에서는 광업이 핵심 산업이다. 광산이 개발된 지 500년이 넘었지만 갱도 안에서는 아직도 은과 주석, 아연, 구리 등이 나온다. 흔히 광산 도시는 흥청망청 향락으로 넘친다. 한때 세계 도시 중 인구가 가장 많았던 곳이 런던이고, 두 번째가 포토시였을 정도다. 화려한 과거의 영광들은 포토시 동전박물관이나 성당 등에 남았다. 동전박물관은 500년의 영욕을 다 드러낸다. 내연기관이 발명되기 전에는 은화를 만드는 동력에도 사람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은괴와 은화들은 에스파냐로 실려 갔다. 대신 볼리비아에 남은 것은 인디오들의 참혹한 생활과 가난이었다. 리코산 은광에는 벌집처럼 생긴 갱도가 곳곳에 뚫려 있다. 포토시 원주민들은 지모신(地母神)을 섬겼는데, 은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술과 담배를 지모신에게 받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세계화의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세계문화유산 리코산은 곳곳에 갱도가 뚫려 있어 벌집을 연상시킨다. 관광객들은 이 곳을 필수 코스로 찾는다. 돈을 내면 지하 200m까지 들어가거나 직접 곡괭이, 삽을 들고 광석을 캐볼 수 있다. 갱도 안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 볼 수도 있다. 애처로운 일은 학교에 있어야 할 어린아이들이 광산에서 관광객을 안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의 일상이다. 밤에는 민둥산이 된 리코산 능선을 따라 설치된 전기불이 삼각형으로 환하게 밝혀진다. 해발 4800m에서 보는 이 삼각형 언덕은 을씨년스런 폐광도시의 낯 풍경보다 더 스산하다. 리코산은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자신이 가진 은을 유럽과 아시아에 다 내놨다. 그런데 지금 포토시의 아이들은 학교가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 갱도에서 광석을 캔다. 10대 아동의 노동을 합법화한 볼리비아 정부를 탓할 일일까. 지난 500년간 이곳은 외부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수탈됐다. 적어도 인류의 양심은 이곳 아이들의 교육과 건강만이라도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방법을 찾으면 없지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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