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라키스 | 작성일 : 2025-04-23 09:35:21 | 조회수 : 27 |
국가 : 중남미 | 언어 : 한국어 | 자료 : 사회 |
출처 : 연합뉴스 | ||
발행일 : 2025-04-21 | ||
원문링크 : https://www.yna.co.kr/view/AKR20250226138100005?section=international/centralsouth-america | ||
원문요약 : 한명은 가톨릭 진보파의 대부였다. 늘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한 남미 지역에서, 그는 거리로 나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애환을 들으며 신의 말씀을 전하려고 애썼다. 서민적인 정서가 가득한 축구와 탱고를 좋아했고, 추기경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소탈하게 살고자 노력했다. | ||
진보적인 프란치스코, 보수적인 베네딕토 16세…한때 교황 자리 놓고 경쟁변화 두려워하지 않은 '용단' 공통점…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
다른 한 명은 가톨릭 보수파의 거두였다. 그는 유럽 정치와 경제의 핵심지역인 독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주로 살았다. 공부하는 걸 유달리 좋아해 당대 뛰어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고전 음악에도 밝아 전문 피아니스트 못지않은 연주 실력을 보였다. 진보파의 대부는 21일(현지시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1936~2025), 보수파의 거두는 그 전임이었던 베네딕토 16세(1927~2022)다. 두 교황은 걸어온 길도, 생각도 전혀 달랐다. 그러나 이 둘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과학 공부를 잠깐 하다가 예수회 수도사로 1958년 입문했다. 30대 시절 수도사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아 1970년대 후반까지 아르헨티나 지방을 돌며 사목 활동을 했고, 1980년에는 산미겔 예수회 수도원의 원장으로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치하에서 예수회를 이끌면서 "비(非)정치화를 견지하라"는 지침을 내려 논란의 중심에 섰다. 독재 정권에 투쟁하던 수많은 동료가 투옥·고문·살해되는 과정 중에 내린 조처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예수회 신부의 강제 연행에 협력하고 그들을 돕지 않았다며 그를 비판했지만, 해방신학자였던 신부와 신학생, 노조 활동가, 작가, 교리 교사, 판사 등이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증언이 잇달았다. 교황은 암울했던 독재 시기에 대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였다"고 후일 회고했다. 독재가 끝난 후 그는 점차 빈곤과 경제 불평등, 동성애, 피임, 이혼, 환경문제 등 현안에 대해 진보적인 목소리를 높였고, 약자를 대변하며 청빈한 삶을 이어갔다. 추기경직에 오른 뒤에도 운전기사를 두지 않았고, 관저에 사는 대신 작은 아파트에서 지냈다. 명성이 점차 드높아지던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사망하자, 그는 차기 교황 중 한명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시대가 온 것은 아니었다.
2005년 교황 선출 회의인 콘클라베에서 2위에 머문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후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도전을 뿌리치고, 교황의 자리를 차지한 이는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후일 베네딕토 16세)이었다. 베네딕토 16세는 1927년 독일 보수의 심장 바이에른주에서 태어났다. 5세 때 뮌헨 대주교의 붉은 복장을 본 뒤 성직을 동경하게 됐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모국어인 독일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등 10개국 언어에 능통한 것은 물론, 신학과 철학에도 정통했다. 그는 신학계에서 '구술하면 논문이 되는 경지에 오른 학자'로 통했다. 역대 교황 중 가장 뛰어난 신학자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베네딕토 16세는 한때 진보적 개혁가였으나 68혁명 후 보수적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해방신학자들과 논쟁했고, 여성 사제 서품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가톨릭 교의와 전통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사상과 신학적 조류와 맞서는 데 주저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 시절, 그는 교황청의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약 25년간 수행하며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진보적 성향의 성직자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신의 로트와일러', 즉 독일 맹견이란 별명이 그에게 따라붙은 이유였다. 그는 가톨릭이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에 물들어가지 않도록 강고한 울타리를 치는데 헌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추락은 교황에 당선된 후에 찾아왔다. 사제들의 성 추문을 비롯해 2012년 베네딕토 16세의 집사 파올로 가브리엘레가 성직자들의 뇌물 비리 등을 담은 기밀문서를 언론에 폭로하면서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는 2013년 2월 건강 문제로 더는 직을 수행할 힘이 없다며 스스로 물러났다. 교황 2천년사(史)에서 자진 사임은 이전까지 단 한 번밖에 없을 정도로 희소해 주변의 만류가 극심했지만, 그는 용단(勇斷)을 내렸다. 그는 전통주의자였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전통에서 벗어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사임 후 콘클라베를 통해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인수인계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까지 했고, 이런 조처를 했으며, 이런 사람들을 해임했으니 이제는 당신의 차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이 되자 여러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역대 교황 중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만큼 반대도 컸지만, 용기를 가지고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그는 성소수자(LGBTQ)를 포용하는 태도를 취했고, 지난해에는 동성 커플에 대한 가톨릭 사제의 축복을 공식 승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출간된 자서전 '희망'에서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은 축복받을 수 있다. 이혼한 사람,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축복받을 수 있다"고 했다. 프란치스코와 베네딕토 16세. 두 교황은 한때 교황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라이벌이자 이혼, 동성애 등의 현안에 관해 견해차가 있는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부였다. 그러나 필요할 때는 결단을 내리고 상대를 포용할 줄 알았다. 두 교황은 다른 듯 닮았던 것이다.
두 교황의 사연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주목받았다. 영화 '두 교황'을 가로지르는 주요 주제 중 하나는 '타협'(compromise)과 '변화'(change)다. 영화 초반 둘은 열띤 논쟁을 벌인다. 추기경 베르고글리오(프란치스코 교황)는 "우리는 신자를 잃고 있으며 가톨릭이 더는 이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며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만, 베네딕토 16세는 그건 '타협'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영화 말미, 전통에 반한다며 교황 사임에 반대하는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향해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타협이 아니요. 변화요." 영화의 키워드는 '삶은 고정된 게 아니다'(Life is never static)라는 대사다. 이 대사는 영화에서 두 번 반복되는데, 한 번은 베르고글리오의 입에서, 다른 한 번은 베네딕토 16세의 입에서 나온다. 영화의 핵심어구인 이 대사처럼, 두 교황의 삶은 실제로 변해갔다.
베네딕토 16세는 미련 없이 교황 자리에서 물러난 후 기도를 하고,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빈자(貧者)의 성자'라고 불렸던 수도사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택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직에 오르자 가난한 이들을 향해 나아갔다. "교황 선출 투표 중에 저는 상파울루 대교구의 대주교셨던 우메스 추기경 옆에 앉았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분은 저를 껴안고 입을 맞추며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곧 가난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 제게 다가왔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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