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라키스 작성일 : 2019-09-17 20:03:26 조회수 : 343
국가 : 아르헨티나 언어 : 한국어 자료 : 경제
출처 : 매경프리미엄
발행일 : 2019.09.17
원문링크 :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19/09/26635/
  • 문가영
  • 입력 : 2019.09.17 06:01


[한꺼풀 벗긴 글로벌 이슈-239]

지난달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좌파 정책을 내세운 후보가 시장 친화적인 현 대통령을 제치자, 좌파 포퓰리즘의 귀환을 두려워한 투자자들이 투매에 나섰다. 하루 만에 아르헨티나 메르발(MERVAL) 지수가 38%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날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는 하루 만에 18.8% 추락했다.

좌파 포퓰리즘에 투자자들이 경기를 일으킨 것은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를 불러온 페론주의의 망령 때문이다.

남미 대륙 남단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는 넓은 영토와 천혜의 자원을 고루 갖춰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5번째로 부유한 나라였다. 이 가운데 1946년 집권한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은 임금 인상, 주요 산업 국유화, 사회복지 확대를 밀어붙이며 노동계와 빈곤층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 원자재 가격이 폭락하면서 늘려놓은 재정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위기가 시작됐다. 페소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물가상승률은 40%까지 치솟고 실질 임금은 곤두박질쳤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주기적으로 경제위기를 겪었으며 지금까지 총 8번 디폴트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지난달 아르헨티나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현 대통령을 상대로 예비 대선에서 15%포인트 차로 승리를 거둔 중도 좌파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후보가 러닝메이트로 내세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과 함께 선거 유세에 나섰다. /사진 제공=블룸버그
▲ 지난달 아르헨티나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현 대통령을 상대로 예비 대선에서 15%포인트 차로 승리를 거둔 중도 좌파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후보가 러닝메이트로 내세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과 함께 선거 유세에 나섰다. /사진 제공=블룸버그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과 재정확대를 통한 복지 증대를 강조한 페론의 정치적 유산이 거듭 아르헨티나의 발목을 잡았다. 2000년대에도 페론주의를 계승한 포퓰리즘 정권이 집권해 정부 지출을 통한 복지혜택을 늘리고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돈을 찍어내면서 25%에 육박하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네스터 키르치레르 전 대통령 부부가 차례로 집권하는 동안 정부개입이 두드러지면서 경제자유도는 곤두박질쳤다. 미국 헤리티지 재단에 따르면 전임 두 대통령이 집권한 12년 동안 아르헨티나의 경제자유도는 지금의 한국과 비슷한 70에서 짐바브웨 수준인 43.8로 떨어졌다.
 

아르헨티나 경제자유도 지표 /사진 제공=헤리티지재단
▲ 아르헨티나 경제자유도 지표 /사진 제공=헤리티지재단

이번 아르헨티나 예비대선을 통해 우리는 좌파 포퓰리즘 정책을 둘러싼 두 가지 극명히 다른 태도가 존재한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덜어줄 정권으로 좌파 포퓰리즘 정권을 선택했으나, 투자자들은 좌파 포퓰리즘 정권의 부활이 예상되자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일으켰다.

좌파 포퓰리즘 식의 부의 재분배, 복지확대를 둘러싼 이러한 양분된 논쟁은 아르헨티나뿐 아니라 프랑스, 미국, 한국 등 전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베스트셀러 '21세기 자본'으로 유명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 후속작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출간하고 세제를 개혁해 억만장자의 자산을 재분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등 미국 민주당의 대선 후보들도 2020년 대선을 앞두고 부유세와 상속세 인상 등을 통한 부의 재분배를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토마 피케티가 지난 12일(현지시간) 발표한 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 표지. /사진 제공=연합뉴스
▲ 토마 피케티가 지난 12일(현지시간) 발표한 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 표지. /사진 제공=연합뉴스

특히 최근 들어 부의 재분배를 둘러싼 논의를 촉발시킨 것은 '포용적 성장 이론'의 등장이다. 포용적 성장이란 지나친 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에 불평등을 완화해야 성장도 지속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모두 포용적 성장을 권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남미의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그리고 유럽의 그리스까지 왜 복지제도를 크게 확충한 나라들이 족족 재정위기와 경제 파탄에 빠져들었던 것일까.

포용적 경제제도가 국가 경제발전으로 이어지는 매커니즘을 자세히 다룬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의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포용적인 경제제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사유재산권 보장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경제제도가 포용적이라는 것은 "사유재산이 확고히 보장되고, 법체계가 공평무사하게 시행되며, 누구에게나 교환 및 계약 등 경제활동의 기회가 주어지는 공평한 경쟁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포용적인 경제제도에 대비되는 개념은 남이 창출한 부가가치를 빼앗아 가는 착취적인 경제제도라고 주장한다. 불평등 그 자체가 아닌 불평등을 유발하는 착취적인 경제 제도가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언뜻 구별하기 어려운 이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전자의 경우 부의 재분배 그 자체가 정책의 목적이 되겠지만, 후자의 경우 국민들이 노력한 만큼 부를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토대로 잠재력을 발휘할 제도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세금을 풀어 가난한 계층에 일자리와 소득을 나눠주는 것이 포용적 경제 제도가 아니다. 포용적 제도에 대한 이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그동안 역사에 등장한 대부분의 착취적인 제도는 심판이 부자의 편을 드는 양상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용적 성장 이론이 주는 교훈은 정부에 가난한 자의 편을 들어 편파 판정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경기의 규칙을 명확히 세우라는 것이다. 지나친 불평등과 불공정한 거래를 유발하는 제도와 관행을 손 보고 원칙을 세워야지 생산물을 직접 빼앗아다가 약자에게 나눠주는 것은 오히려 일할 의지를 줄이는 일이다. 이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고기를 잡아주는 것, 그것도 남이 잡은 고기를 빼앗아 나눠주는 것에 가깝다. 정부는 시장이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도록 감시하고 패자에게는 안전망과 재기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공평한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부를 나눠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가난한 계층에 부를 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니 말이다. 오히려 세금을 거둬들여 부를 직접 분배하는 것이 목표를 빨리 달성하는 지름길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포용적 경제제도를 통한 성장을 목표로 한다면 이렇게 모로 가면 서울을 못 간다.

불평등이 완화되는 현상은 포용적 성장으로 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풍경과 같다. 풍경이 예뻐 보인다고 모로 빠지면 그리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로 간다.

[문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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