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 야구 공화국과 나비가 된 미라발 자매 :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de Guznán) 기행
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10 09:46:22 조회수 : 110
국가 : 도미니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옥빛 카리브 해, 그 절경을 자랑하는 섬들 중 쿠바와 푸에르토 리코 사이에 위치한 것이 에스파뇰라 섬으로 그 섬의 절반(나머지 절반은 아이티)을 차지하고 있는 도미니카 공화국은 구미 관광객들에게는 멕시코 칸쿤보다 훨씬 싼 값에 카리브 바다를 즐길 수 있는 저렴한 관광 국가로, '나 음악 좀 안다'는 이들에게는 메렝게의 고향으로, 그리고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미국을 제치고 최고의 야구 국가로 각인되어 가는 작으나 대단한 나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오는 3 월에 열리는 제 2 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 도미니카 대표로 출전 예정인 선수들이 에르빈 산타나, 알베르트 푸홀스, 알폰소 소리아노 등등, 거기다 미국 국적을 지녔음에도 꼭 부모의 나라 도미니카 대표로 뛰고 싶다고 달려든 알렉스 로드리게스까지 가세 예정이라니 '야구의 종주국 미국은 이제 가라' 고 큰소리칠 만한 그야말로 현존 최강의 야구 공화국 아닌가.



그런 도미니카는 우리나라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나라여서 적지 않은 한국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나라 방문객들은 공항에서 꼭 사야 입국이 가능한 여행자 카드의 면제국 명단에 ‘남쪽 코리아(South korea)’ 이름이 당당히 올라와 있다. 그렇게 수도 산토도밍고의 라스아메리카스 공항 건물을 빠져 나오니 쿠바 아바나의 말레콘을 연상케 하는 푸른 바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데 그때부터 당장 들리는 소리가 ‘기름값이 비싸서’, ‘기름값 때문에…’ 다. 이상한 건 쿠바와 마찬가지로 석유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데도 택시를 포함해 대부분 차가 수동 기어가 아닌 자동이더라는 것.
산토도밍고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끼스께야(Quisqueya) 야구장이었다. 당시 2007년 12월은 도미니카 겨울리그 기간이었는데 산토도밍고 연고의 레오네스 데 에스코히도 팀에 한국 롯데 자이언츠의 두 선수가 비시즌인 겨울에 훈련 차 와서 뛰고 있다고 하기에 취재라도 해볼까 싶어 허겁지겁 달려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팀 더그아웃에 한 젊은 동양 선수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자신 있게 “안녕하세요!” 하면서 손을 흔들었더니 그 친구 왈, 서투른 스페인어로 "나, 한국 아니에요. 일본이에요. 일본" 이러는 게 아닌가. 그는 일본 주니치 드래곤스 소속의 투수 가와이 스스무로 그의 말인즉슨 한국에서 온 두 명은 얼마 전 소속팀의 부름을 받고 급하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왕 이리 된 거 “나, 오늘 선발이에요”라며 자랑스럽게 말하던 그 일본 좌완 투수의 경기나 지켜보기로 했다. 일요일 저녁이라 꽉 찬 경기장엔 공수 교대 때마다 메렝게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럴 때면 관중들이고 맥주 파는 판매원이고 할 것 없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댄다. 그런 열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내 앞에선 그리 당당하던 일본 청년, 공 하나하나를 던질 때마다 잔뜩 긴장하고 시간을 끈다. 어째 간당간당한 느낌인데도 크게 실점은 하지 않고 위기를 잘 막아 4회까지 1실점 비자책으로 버티다 "잘 던지고 있으니 바꾸지 말라"고 외치던 에스코히도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도미니칸들은 내가 그 선수 응원하러 온 일본 사람인줄 알고 에스코히도 팀의 사자 마스코트는 내게 두 손을 합장하는 자세의 불교식 인사를 했다. 그런데 뒷줄에 어떤 사람이 응원용 대자보 같은 걸 들고 나타났는데 그 내용이 흥미로웠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은 트루히요와 에스코히도 팀이다!’ 에스코히도 팀을 약 올리려는 상대팀 응원객인 모양인데 그걸 보고 든 생각, ‘그래도 도미니카 사람들은 독재자 트루히요를 나쁘다고는 생각하는구나. 영웅으로 떠받들지는 않는 모양이네.’




도미니카는 외세의 개입이 극심했던 쿠바와 비슷한 점이 많은데 한가지 다른 점은 도미니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이티가 프랑스어를 쓰는 것에도 볼 수 있듯 이 땅에는 프랑스 세력까지 들어와 얽히고 설킨 역사가 있었다는 점이다.
스페인, 프랑스, 아이티 등의 개입과 지배 후 1844년, 아이티로부터도 벗어나 도미니카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쿠바와 마찬가지로 그게 또 진짜 독립이 아니었다. 라틴아메리카 땅에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던 스페인이 다시 개입했다가 미국이 끼어들어 쫓아내면서 그때부터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미국의 지지를 받는 군부 독재정권이 등장했으니 그게 바로 라파엘 트루히요였다. 트루히요는 32년간의 집권 후 1961년에 암살되었는데, 그의 집권 시기의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일명 ‘나비들(Mariposas)’로 불리는 미라발 가(家) 자매들의 슬픈 이야기이다.
미라발 자매는 산토도밍고의 엘리트 집안 딸들로 트루히요가 참석한 한 파티 장소에서 약간의 트러블을 일으켰다고 온 가족이 박해를 받게 되어 아버지는 죽고 세 자매는 트루히요 독재에 반대하는 반정부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트루히요의 실각 직전에 감옥에 간 남편들을 면회하고 오다가 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가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구타당한 뒤 암매장되었다. 이 자매들의 이야기는 어두운 시절에 여성에게 가해질 수 있는 모든 형태의 폭력을 보여주는 한 예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문학 작품과 영화 등에서 다뤄졌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발행된 200페소짜리 새 지폐에도 그녀들의 초상이 찍혀있다.




어쨌든 그런 인물이 바로 트루히요인데, 독재기간이 길면 길수록 추종자도 많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영웅 대접을 하지 않을까 했더니만 도미니카 사회는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에스코히도 팀을 트루히요에 비유한 그 대자보를 보자마자 에스코히도 팀 팬들이 격분해 빼앗아서는 막 찢던 것을 본다면. 실제 트루히요는 도미니카 사람답게 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내가 보고 있는 이 경기의 두 팀, 산토 도밍고 연고의 라이벌팀들인 에스코히도와 리세이 팀을 자기 마음대로 합병하는 등 야구계에서도 철권을 휘두르다 도미니카 야구판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적이 있다 한다.
그런 도미니카에서는 국민 선거를 앞둔 후보들의 정치 광고에도 그저 야구다. 정치가들이 야구 선수 복장을 하고서는 '국민 여러분의 속을 확 푸는 안타를 치겠습니다' 하기도 하고 투수 복장을 하고 나와선 '국민 여러분의 소망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스트라이크를 던지겠습니다' 하기도 한다. 게다가 TV 에서는 도미니카를 대표하는 야구 영웅 중 한명인 사미 소사의 생일 파티 뉴스가 일주일 내내 나와서 미녀 아내와 추는 요염한 메렝게 춤 장면을 지겹도록 보기도 했다. 그 분위기에 젖어 나도 일주일 뒤 다시 한번 끼스께야 야구장으로 향했다. 한 세대를 풍미한 도미니카 출신의 명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협회에서 주는 상을 타러 온다고 해서 갔는데 메이저리그를 호령한 투수치고는 체구가 너무 작아 보였다.




작은 체격의 핸디캡을 팔꿈치뼈가 으스러지도록 던지는 근성과 끈기로 극복해 부와 명예를 거머쥔 마르티네스의 모습을 보면서 도미니카 사람들에게 야구가 어떤 의미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야구, 신나는 음악, 아름다운 바다, 무엇보다 적극적인 친절로 무장한 도미니카 사람들 때문에 언제보다도 즐거운 여행을 했던 그곳이었지만 그 어느 라틴아메리카 나라들보다도 극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이 심각한 그 땅에서 오직 야구로 인생 역전을 꿈꾸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나올 때 경기장에 소리 높이 틀어주었던 듀오 디나미코의 노래 '견디어 내리라(Resistire)'의 가사처럼 힘든 현실을 견디어온 도미니칸들에게 야구는 그들의 꿈이자 현실 속의 작은 위안이요 실낱같으나 포기할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 남겨진 희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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