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Latin America 작성일 : 2017-03-07 16:25:07 조회수 : 2,478
국가 : 쿠바


 

에밀리아노 두아르떼 교수 (쿠바 아바나 대학교 정치학과)

  

   피델 카스트로라는 인물은 20세기의 마지막 50년을 앞두고 등장하면서부터 수 많은 토론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아바나의 카톨릭재단인 벨렌학교를 졸업하던 당시를 그를 가르쳤던 예수회 성직자들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피델 카스트로(1942년부터 1945년까지 본교에서 수학). 문학과 관련된 모든 과목에서 매우 뛰어났다. 또한 언제나 학교의 깃발의 가치와 자긍심을 수호하던 진정한 운동선수였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심과 애정을 살 줄 알았다. 그는 법학을 전공할 것인데, 우리는 그가 앞으로 그의 인생의 책을 빛나는 페이지들로 채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피델은 반드시 크게 될 재목이다.”

   그는 아바나대학교 법학과의 학생장으로 자유주의 언론이 망각하고 있던 쿠바의 국민영웅인 호세 마르띠의 사상을 그가 죽은 지 백 년이 되던1953년에 되살린 학생 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당시 언론은 호세 마르띠를 단지 낭만적이고 시적으로만 추억하고 있었고 결코 스페인에 대적하여 쿠바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또한 반제국주의를 주창했던 2차 전쟁을 이끈 혁명적 면모를 간과하고 있었다. 1953년 당시 운동의 우두머리로써 쿠바의 도시 산티아고에서 압정을 펼치던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두 번째 기지였던 몬까다 병영을 덮쳤으나 군사적으로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치적, 이념적으로는 매우 큰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때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항하여 쿠바의 독립을 향해 나아가던 마지막 단계의 초기였다.

   피델은 수감생활과 멕시코에서 1956년 원정대 지도자가 되어 망명생활을 마치고 쿠바의 동쪽에 있는 마에스뜨라 산맥의 산에서 게릴라전투를 이끌며 다시금 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귀환하였다. 1959년 1월에는 반란군 군대조직의 최고 지휘관이 되었고,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그의 반란군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던 피로 물든 독재군부정권에 맞서 쿠바혁명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그리하여 반란과 쿠바 민중의 승리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쿠바를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매우 높은 수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이념적 개혁 과정을 추진하였으며, 그러한 개혁들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06년에는 그의 동생이자 1953년부터 그의 혁명동지인 라울 카스트로에 의해 조직된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단체에 그의 권력을 이양하였다. 라울 카스트로는 2008년 공식적으로 국가평의회와 쿠바공화국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공산당 제1서기직과 쿠바 국회의원직을 내려놓았다. 건강 문제가 어느 정도 호전된 후 피델은 게릴라전을 계속하였는데, 이번에는 쿠바의 언론을 통하여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문제들, 주로 생태적인 문제들과 세계평화에 관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발표하였다. 피델을 만나고자 했던 많은 정치 지도자들과 숱한 외국인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2016년 11월 25일에 사망하였다.

   비록 순리적이고 기다려온 죽음이었으나, 그의 사망소식은 쿠바대중의 다수를 비탄에 젖게 하였으며 전세계의 많은 정치영역과 사회영역에서 동요를 일으켰다. 쿠바에서는 이 부고를 슬퍼하며 조직적으로 혹은 임의적으로 대중운동까지 일어났다. 수만명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의 사상을 이어갈 것이라는 신념과 희망을 나타내고, 사회주의 기획의 오류들과 보완점들을 정비하고 국가의 번영을 위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것을 다짐 하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에 있어 단지 자유의 상징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주권을 상징하기도 하고 자기결정권을 상징하기도 하며 사회정의를 상징하기도 하고 국제주의를 상징하기도 하며, 반제국주의를 상징하기도 한다. 비록 세상의 많은 곳에서 이런 말들은 “이미 유행을 지났다”고들 하지만 쿠바 혁명가들에게는 아주 가치 있는 전통들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와 전 세계에 큰 명성과 영향력을 끼친 역사적 인물이었으며, 그의 사상이나 정치 행위에 찬동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되었다. 그의 의견에 합당하게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겠으나, 그가 남긴 사회적, 문화적 유산과 국제적 연대의식을 매우 강렬하게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같이 강인한 지도자의 죽음은 뛰어난 인재이며 천재적인 정치가를 잃었다는 뜻이다. 그에게도 공과 과가 있으나 최소한 기본적인 존경심을 표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에게 경외심을 표할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이후로도 계속 연구되고 개선 및 발전되어야 하고, 쿠바의, 나아가 라틴아메리카의, 더 나아가 세상의 더욱 진보적인 사상적 유산과 함께 또한 쿠바와 세계가 겪었고, 앞으로 겪게 될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경험과 함께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쿠바의 사회주의 기획에 드러났던 여러 불충분한 점들과 미흡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민중의 지지와 저항을 배경으로 쿠바를 세계가 주목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작은 섬나라로부터 세계의 가장 위력하고 공격적인 강대국에 대항하는 것은 그 자체로 존경스럽다. 그리고 세계의 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하여 쿠바는 이에 따라 해외교역량의 85%를 잃었음에도 여전히 평등과 사회정의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점 또한 그렇다. 더불어 인민들의 참여를 이끌며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개혁과정을 이끌어 온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쿠바로부터는 지구 저 편에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어려운 나라들에 국제원조를 실시하고 있다는 점 또한 그렇다. 마지막으로 미국 정부가 쿠바와 다시 협상하도록 하여 실제로 미국이 그렇게 원하던 쿠바 사회주의 체제의 전복없이2014년 양국간 수교정상화가 이뤄진 점은 말할 것도 없다.

   피델 사망 후 쿠바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비탄에 잠겨 있으면서 삼가는 분위기였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지는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쿠바의 절대다수는 그 추도 분위기를 존중하고 있다. 피델을 경외하는 모습은 특히 나라의 모든 지방의 아이들과 청년들이 참석한 모습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들은 이 역사적인 지도자의 사회주의적 사상을 이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표현하였다.

   최고 사령관 피델 카스트로의 재는 쿠바의 동부에 있는 산티아고시로 옮겨졌는데, 산티아고시가 가진 상징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19세기에 스페인에 맞선 독립전쟁이 발발했으며 이후 20세기에 처음에는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폭정에 맞서다가 나중에는 미국에 맞선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이 곳에 있는 공동묘지에는 1868년 독립전쟁을 지휘했던 국부인 까를로스 마누엘 데 쎄스뻬데스가 묻혀 있고, 모든 쿠바인들의 스승이자 쿠바독립의 주창자로써 1895년 2차 전쟁을 지휘했던 호세 마르띠가 묻혀 있기도 하다.

   피델이 죽은 후 쿠바는 바뀔까? 개혁정책이 추진된 지 이미 몇 년이 흘렀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쿠바는 지난 몇 년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변화를 겪어 왔다. 라울 카스트로는 근본적인 면에서는 그의 형의 자취를 따라가고 있으나 새로운 개혁과 정치스타일을 이끌고 있다. 그는 다른 조건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추진하는 개혁들은 성격이 다를 수 밖에 없다. 피델 카스트로가 정치권력을 행사하지 않은 지는 이미 10년도 더 지났다.

   본 글에서 중요한 논점 중 하나는 쿠바와 미국의 관계일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의 변증법적 사상은 정치의 기법과 전략과 관련된 것으로 향후 방향을 설정하는데 매우 유용할 것이다. 그는 갈등관계를 종식시킬 수 있는 협상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늘 쿠바를 지배하려 한, 그리고 그 폭력적 정책을 전 세계적 차원에서 펼치고 있는 이 초강대국 이웃나라가 줄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인지하고자 하였다. 모든 위험들을 직면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하지만 또한 정치적 고지식함을 피해야 한다.

   내가 보는 쿠바는 현재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나라이다. 그 원인들은 다양하다. 미국의 경제와 교역 및 금융제재는 외교관계가 정상화된 지금에도 몇 가지 변화의 조짐은 있으나 아직도 지속되고 있으며 치외법권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제 3국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제적 사회주의 공동체의 소멸로 인한 결과들도 언급할 수 있다. 또한 자원이 부족한 쿠바의 특징도 원인들 중의 하나로 포함될 수 있을 것이며, 쿠바 지도부의 오류들 특히 정치경제 부문에서 근본적인 오류들 또한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흥미로운 자료들이 존재한다. 2015년 인간개발지수에서 쿠바는 186개국들 중 45위를 차지했다. 2013년 세계은행에 따르면 쿠바의 기대수명은 79,24세로 191국가들 중 34위다. 2016년 유아사망률은 4.3으로 2015년에도 그랬듯이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지역을 통틀어 가장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의료서비스는 전면 무료이다. 또한 최신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 중요한 발전을 보이고 있으며 쿠바의 생명공학분야는 세계수준에서 상위권에 속한다. 교육체계는 매우 값비싼 예술분야 교육도 포함해서 모든 수준의 교육을 전면적으로 공공영역에서 무상으로 운영한다. 체육분야에서는 부진을 좀 겪어왔으나 라틴아메리카와 전세계에서 여전히 잠재력을 발휘하고 있다. 쿠바의 치안과 질서는 전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2016년 4백만 외국인 관광객들을 맞이했으며, 이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치이다. 이와 더불어 다른 사회적 • 문화적 흥미로운 결과들이 있다. 이러한 성취들이 피델 카스트로의 집권기에 이룩했다는 것은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쿠바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쿠바의 경제적 퇴보를 만회하기 위해 2011년의 6대 국회가 승인하고 2016년의 7대 국회가 재차 승인하고 인민권력총회가 승인한 경제 및 사회 발전모델의 현대화과정이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새로운 정치와 문화의 개혁들에 관한 국가차원의 정치토론을 발전시켜 나가길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총체적으로 현대화 개혁이 통합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것이다. 이미 합의된 매우 중대한 정치적 변화라 할 수 있는 것은 국회와 정당의 매우 중요한 요직에 같은 인물들이 5년의 임기를 연속적으로 2회 초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내가 보는 미래의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의 국가들과 제 3세계 국가들과 연대함으로써 더욱 통합을 이루어 더 나은 삶의 수준과 질을 향유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이러한 통합과 연대는 현재도 아주 훌륭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 중국 등의 주요 동맹 국가들, 평범하지만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 정상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국가들, 그리고 현재는 쿠바와 외교관계가 중단된 아주 극소수의 국가들과도 계속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 내가 보는 미래의 쿠바는 자유롭고, 자치적이고, 좀 더 공정하고,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민주적인 나라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전략적인 문제들을 결정하는 데 있어 쿠바인들이 더 많이 참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번역: 손현정 (부산외국어 대학교 글로벌 대학원 박사과정)

  

   La figura de Fidel Castro ha sido objeto de múltiples debates y controversias desde su aparición en la arena política en los años 50 del siglo XX. En la memoria de su año de graduación en el Colegio de Belén en La Habana (escuela religiosa), sus profesores jesuitas escribieron: “Fidel Castro (1942-1945). Se distinguió en todas las asignaturas relacionadas con las letras. …Fue un verdadero atleta, defendiendo siempre con valor y orgullo la bandera del colegio. Ha sabido ganarse la admiración y el cariño de todos. Cursará la carrera de Derecho y no dudamos que llenará con páginas brillantes el libro de su vida. Fidel tiene madera y no faltará el artista”.

   Dirigente estudiantil en la Facultad de Derecho de la Universidad de La Habana. Líder del movimiento que rescató el pensamiento de José Martí –Héroe Nacional de Cuba- en el año de su Centenario (1953), cuando la prensa liberal ni lo recordaba, o lo hacía solo para hablar del poeta y romántico, y nunca del revolucionario que dirigió la segunda guerra por la independencia de Cuba contra España y que fue antiimperialista. Jefe del grupo que, en 1953, en la ciudad de Santiago de Cuba, asaltó el Cuartel Moncada, segunda fortaleza de la tiranía de Fulgencio Batista, que fracasó militarmente, pero tuvo un gran impacto político e ideológico como inicio de la última etapa por la independencia de Cuba –en esta ocasión contra la dominación imperialista de Estados Unidos-. Jefe del grupo de expedicionarios que, en 1956, después de su salida de la cárcel y del exilio en México, partió desde ese país y desembarcó en Cuba para reiniciar la lucha por la independencia a través de la guerra de guerrillas en las montañas de la Sierra Maestra, en la zona oriental del país. Líder principal de las fuerzas rebeldes que en enero de 1959 –se cumplieron ahora 58 años- lograron el triunfo de la Revolución cubana contra una sangrienta dictadura militar financiada y armada por el gobierno estadounidense.

   Fidel Castro se convirtió, entonces, en el símbolo de rebeldía y victorias del pueblo cubano. Comenzó un proceso de profundas transformaciones económicas, sociales, políticas, culturales e ideológicas de transición al socialismo en Cuba que continúa en la actualidad. En 2006 traspasó el poder a un grupo de dirigentes partidistas y estatales encabezados por Raúl Castro, su hermano y compañero de lucha en todas las acciones mencionadas desde 1953, quien en 2008 fue elegido oficialmente como Presidente de los Consejos de Estado y de Ministros de la República de Cuba. Fidel Castro renunció a su cargo como Primer Secretario del Partido Comunista y a su escaño como diputado a la Asamblea Nacional del Poder Popular (parlamento cubano). Después de recuperarse de serios problemas de salud, Fidel continuó sus batallas guerrilleras, esta vez en la prensa cubana a través de sus reflexiones sobre los problemas políticos nacionales e internacionales, principalmente ecológicos y de la paz mundial. Recibió a numerosos mandatarios y a otras personalidades extranjeras que así lo solicitaron. Falleció el 25 de noviembre de 2016.

   Aunque lógica y esperada, la noticia de su muerte causó consternación en la mayoría del pueblo cubano y en sectores políticos y sociales de diferentes continentes. En Cuba hubo movilización popular, organizada y también espontánea, y expresiones de pesar por el suceso. Se desarrollaron homenajes de millones de personas a la figura del líder, a la vez que muestras de confianza y esperanza en la continuidad de su pensamiento, en la corrección de errores e insuficiencias del proyecto socialista, y en mejores tiempos de prosperidad para el país.

   ¿Es Fidel Castro para Cuba solo un símbolo de libertad? No; también de soberanía y autodeterminación; de justicia social, internacionalismo y antiimperialismo militante. Aunque en muchos lugares del mundo estas palabras “ya no están de moda”, para los revolucionarios cubanos son tradiciones muy valiosas.

   Fidel Castro fue una personalidad histórica de gran prestigio e influencia, en Cuba y en el mundo, reconocido por millones de personas, más allá de la adhesión o no a su pensamiento y a su accionar político. Las opiniones pueden estar legítimamente a favor o en contra, pero se ha observado una fuerte tendencia a reconocer sus valores y a agradecerle por su obra social, cultural y de solidaridad internacional. La muerte de un líder fuerte como Fidel Castro significa la pérdida de un ser extraordinario, portador de una genialidad política particular. A él, con sus aciertos y errores, habrá que acercarse, al menos, con respeto; para muchos, con admiración. Su pensamiento hay que estudiarlo, tomar lo mejor y más avanzado, y continuar enriqueciéndolo en simbiosis con el legado del pensamiento cubano, latinoamericano y mundial más progresista y con la nueva experiencia socialista en las condiciones históricas que viven y vivirán Cuba y el mundo.

   Más allá de las insuficiencias y deficiencias del proyecto cubano, Fidel Castro –con el apoyo y la resistencia del pueblo de Cuba- logró poner a este país en un lugar destacado en el mapa político mundial. Ha sido admirable enfrentar, desde una pequeña isla, a la potencia más poderosa y agresiva de la Historia; sostener un sistema de igualdad y justicia social después de la debacle del sistema socialista mundial con la que Cuba perdió alrededor del 85 % de su comercio exterior; emprender un proceso de reformas que ha permitido la subsistencia del régimen con participación popular; prestar ayuda internacionalista en diferentes esferas a países de Asia, África y Latinoamérica; y, finalmente, lograr que el gobierno de EE.UU. se sentara en la mesa de negociaciones y restableciera las relaciones diplomáticas en 2014 sin haber alcanzado su objetivo de destruir el socialismo en Cuba.

   ¿Cómo fue el ambiente en la sociedad cubana en general después de la muerte de Fidel? Ha sido de luto y respeto. Ello no significa que absolutamente todas las personas manifiesten esos sentimientos, pero, por lo menos, la mayoría absoluta de la población muestra respeto a su memoria. En estos homenajes destacó la participación de los niños y jóvenes en todas las provincias del país, que expresaron su disposición de continuar el pensamiento socialista del líder histórico.

   Las cenizas del Comandante Fidel Castro fueron trasladadas a Santiago de Cuba, en el oriente del país, lo que posee un gran simbolismo. Por esa zona de Cuba comenzaron las dos guerras por la independencia del siglo XIX (contra España) y la lucha revolucionaria de Fidel Castro en los años 50 del siglo XX (contra la tiranía de Fulgencio Batista primero, y contra Estados Unidos después). En la misma necrópolis de Santiago de Cuba descansan los restos mortales de Carlos Manuel de Céspedes, el Padre de la Patria, iniciador de la primera guerra de independencia en 1868; y de José Martí, el Maestro de todos los cubanos y Apóstol de la independencia de Cuba, quien encabezó la segunda guerra en 1895.

   ¿Cambiará el país después de la muerte de Fidel? Es evidente que el proceso de reformas comenzó varios años antes. Cuba ha cambiado en los últimos años en todas las esferas de la sociedad. Raúl Castro continúa el curso de su hermano en los aspectos fundamentales, pero lleva una nueva forma y estilo de hacer política. Él dirige el Estado en condiciones diferentes, por lo que las reformas son también distintas. Fidel Castro no detentaba ya el poder político directo por más de 10 años.

   Un aspecto clave en este análisis corresponde a las relaciones Cuba - Estados Unidos. El pensamiento dialéctico de Fidel Castro –relacionado con las tácticas y la estrategia de conducción política- será muy útil para orientarse en el futuro. Él expresó su apoyo a las negociaciones para la solución de conflictos pero, al mismo tiempo, alertó sobre los riesgos en materia de relaciones con un vecino tan poderoso, ansioso siempre por dominar Cuba y caracterizado por una política agresiva a escala global. Hay que saber enfrentar y gestionar todos los riesgos, pero hay que evitar también caer en la ingenuidad política.

   Veo a Cuba ahora como un país en un desarrollo sostenido, aunque aún lento. Las causas son varias: el bloqueo económico, comercial y financiero por parte de EE.UU., que a pesar de haberse restablecido las relaciones diplomáticas y mostrado algunos cambios, aún permanece y con carácter extraterritorial, pues afecta a terceros países; las consecuencias derivadas de la desaparición de la comunidad socialista mundial; las características de Cuba como país con recursos escasos; y los errores de la dirección cubana, en lo fundamental en política económica. No obstante, muestra algunos datos interesantes: en el índice de desarrollo humano Cuba se ubica en el lugar 45 entre 186 países (año 2015); la esperanza de vida es de 79,24 años (lugar número 34 entre 191 naciones, según un ranking publicado en 2013 por el Banco Mundial); 4.3 de mortalidad infantil (2016, la más baja de América Latina y el Caribe, igual que en 2015); la atención médica es totalmente gratis; es una de las mayores potencias mundiales en biotecnología, con un desarrollo importante de empresas de alta tecnología; el sistema de educación –incluyendo la costosa enseñanza artística- es completamente público y gratuito en todos los niveles; en deporte, a pesar de los altibajos, continúa siendo una potencia en Latinoamérica y el mundo; la seguridad y tranquilidad ciudadanas es una valor social extraordinario reconocido por todo el mundo; en 2016 alcanzó la cifra de 4 millones de visitantes extranjeros (turistas), la más alta de su historia; y otros resultados sociales y culturales de interés. No es un secreto que muchos de estos logros fueron alcanzados durante el mandato de Fidel Castro.

   ¿Qué esperan los cubanos actualmente? Que avance más aceleradamente el proceso de actualización del modelo económico y social de desarrollo socialista que comenzó con la aprobación de la estrategia en el VI Congreso del Partido (2011), confirmada en el VII Congreso (2016) y aprobada por la Asamblea Nacional del Poder Popular, a fin de resolver el retraso económico. Igualmente, desean el desarrollo del debate político nacional acerca de las nuevas reformas políticas y culturales, para lograr la integralidad de la actualización del modelo en su conjunto. Un cambio cardinal –ya aceptado como política- es la no permanencia de las mismas personas en los cargos fundamentales del Partido y el Estado por más de dos períodos consecutivos de 5 años.

   Veo a la Cuba del futuro como un país socialista, solidario, con nivel y calidad de vida superiores, más integrado con los países de América Latina, Caribe y Tercer Mundo; con excelentes relaciones con sus principales aliados actuales de otras latitudes (Rusia, China y otros países); con relaciones regulares, pero aún complejas, con EE.UU.; con relaciones restablecidas y normales con aquellos muy pocos países con quienes hoy no las tiene. Veo a la Cuba del futuro como un país libre, soberano, más justo, más humano y más democrático y, por tanto, con una mayor participación del pueblo en la toma de decisiones sobre los asuntos estratégicos de la Pat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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